경찰국장 김순호는 노동운동에 몸담던 시절,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동료들을 밀고해 경찰 경장특채가 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순호는 경찰 특채와 동시에 지금까지 고속승진했다고 한다. 경찰청 인사자료에 따르면 1989년 8월, 김순호는 순경을 건너뛰고 경장 특채된 후 1992년 2월(2년6개월 만)에 경사로 특별승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순호는 1995년 5월(2년2개월 만)에는 경위로 또 다시 승진했다. 통상적으로 1990년 당시 순경 공채자가 경위 직급까지 승진하는 데에 최소 15년이 소요되는데 김순호는 불과 4년 8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경위 직급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올해 7월 29일 정부가 신설한 경찰국의 초대 수장이 된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초고속 승진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김순호 국장은 당시 인노회 활동 사실은 인정하나 밀고했다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정황과 증거들은 이 모두가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1989년은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민주화 진영이 극심히 탄압받던 시기였다. 특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그 피해를 크게 입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순호는 학생운동을 했었고 시위에 참석했다가 붙잡혀 1983년 강제 징집되었다. 그 후 보안사령부의 녹화사업 대상자로 관리받았다. 녹화공작이란 보안사가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군에 징집한 뒤 교내 동향 등의 첩보를 수집하도록 강요한 일을 말한다. 제대 후 김순호는 노동운동조직인 인노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부천지역 조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89년 4월 김순호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곧바로 인노회 회원 15명이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렇게 수감된 김순호의 한 해 선배이자 그를 아끼던 노동운동가 ‘최동’은 조사과정에서 고문과 협박, 자해로 인해 실어증, 우울증, 정신분열을 겪다 1990년 8월 분신하게 된다.
증언에 따르면 김순호는 징집된 1983년부터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정보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녹화공작 대상자로 강제 징집돼 군에 복무하면서 모교인 성균관대 교내 서클 동향을 보고했다. 징집 당시에는 주로 성균관대의 주요 이념 서클의 동향보고를 맡아왔다. 담당한 서클은 농촌문제연구회, 동양사상연구회, 휴머니스트, 심산연구회, 고전연구회 등 5개였다고 한다. 그 중 동양사상연구회와 심산연구회는 인노회 활동으로 구속된 뒤 고문 후유증 끝에 분신 사망한 최동 열사가 속했던 곳이었다.
김순호는 전역 후에도 공작 활동을 이어갔음이 명백하다. 보안사가 작성한 녹화공작 시행 지침에 따르면 대상자들은 전역 후에도 군과의 활동망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되었있으며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에서 낸 보고서에도 (전역한 녹화공작 대상자를) 프락치로 활용한 대목이 존재한다. 이 사실에 따르면 김순호는 제대 후 노동운동에 입문한 건 처음부터 인노회를 와해 시킬 의도로 잠입한 것이 된다.
김순호는 인노회 구속과 동시에 89년 8월, 경장으로 특채된다. 김순호 국장을 경찰로 특채했던 사람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거짓말을 지어냈던 홍승상 전 경감이었다. 그리고 김순호가 대공분야에서 근무하던 90년대에 범인검거 유공 포상을 몇 차례나 받은 기록이 있다. 이것들이 과연 무엇의 대가였겠는가? 당시 노태우 정부는 공안탄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화 세력을 처참히 짓밟았다. 당시 경찰 특채와 포상의 조건은 불보듯 뻔하다. 그 시절 가장 가까웠던 동지는 치안본부의 비인간적 폭력조사 탓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와중에 김순호는 대공경찰 특채 뒤 승승장구하며 90년 당시 치안본부를 연상케하는 현 경찰국의 수장이 되었다. 같은 삶을 살아왔음에도 어떻게 이리 대비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김순호는 인노회 등 관련자 검거에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자신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주사파와 단절”을 위해 경찰을 찾아갔을 뿐이라는 터무니없는 변명만 늘어놓고있다. 또한 몇 년 전 김순호는 90년 최동의 죽음 때 왜 오지 않았냐는 지인의 물음에도 “당시 절에 들어가 경찰시험을 준비해 소식을 몰랐다”고 잡아뗐다. 김순호는 동지들을 밀고하고도 민주열사와 그 역사 앞에 일말의 반성조차 없었다.
정부는 이렇게 김순호 국장을 임명하며 경찰국이 30년 전 공안정국에 앞장섰던 치안본부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게 되었다. 독립성을 잃은 경찰은 정권의 수족 노릇을 하며 결국 민중을 탄압하게 될 것이다. ‘경찰’의 자격이 없는 김순호는 지금 당장 사퇴해야 마땅하다. 또한 김순호의 의혹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던 박근혜의 국정농단 당시보다도 못한 지지율을 기록하며 취임 한 달 만에 정권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큰 부정평가의 항목은 단연코 인사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인사는 만사라고 했다. 이러한 의혹투성이 문제의 인사는 필연적으로 불공정과 몰상식의 결과를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는 것은 과거의 수많은 불행한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휴가기간 동안 그토록 고심했다던 초심이 진정 국민이라면 ‘프락치’ 김순호를 지금 당장 경질하고 경찰국 설치를 철회하여 국민들이 우려하는 13만 경찰의 독립성을 즉각 보장하라!
만약 지금과 같은 불공정과 몰상식의 인사 기조를 이어간다면 공정과 상식을 바라는 국민은 박근혜 정권을 심판했던 것처럼 또다시 촛불로 윤석열 정부를 심판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22년 8월 11일
한국진보연대
경찰국장 김순호는 노동운동에 몸담던 시절,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동료들을 밀고해 경찰 경장특채가 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순호는 경찰 특채와 동시에 지금까지 고속승진했다고 한다. 경찰청 인사자료에 따르면 1989년 8월, 김순호는 순경을 건너뛰고 경장 특채된 후 1992년 2월(2년6개월 만)에 경사로 특별승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순호는 1995년 5월(2년2개월 만)에는 경위로 또 다시 승진했다. 통상적으로 1990년 당시 순경 공채자가 경위 직급까지 승진하는 데에 최소 15년이 소요되는데 김순호는 불과 4년 8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경위 직급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올해 7월 29일 정부가 신설한 경찰국의 초대 수장이 된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초고속 승진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김순호 국장은 당시 인노회 활동 사실은 인정하나 밀고했다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정황과 증거들은 이 모두가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1989년은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민주화 진영이 극심히 탄압받던 시기였다. 특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그 피해를 크게 입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순호는 학생운동을 했었고 시위에 참석했다가 붙잡혀 1983년 강제 징집되었다. 그 후 보안사령부의 녹화사업 대상자로 관리받았다. 녹화공작이란 보안사가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군에 징집한 뒤 교내 동향 등의 첩보를 수집하도록 강요한 일을 말한다. 제대 후 김순호는 노동운동조직인 인노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부천지역 조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89년 4월 김순호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곧바로 인노회 회원 15명이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렇게 수감된 김순호의 한 해 선배이자 그를 아끼던 노동운동가 ‘최동’은 조사과정에서 고문과 협박, 자해로 인해 실어증, 우울증, 정신분열을 겪다 1990년 8월 분신하게 된다.
증언에 따르면 김순호는 징집된 1983년부터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정보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녹화공작 대상자로 강제 징집돼 군에 복무하면서 모교인 성균관대 교내 서클 동향을 보고했다. 징집 당시에는 주로 성균관대의 주요 이념 서클의 동향보고를 맡아왔다. 담당한 서클은 농촌문제연구회, 동양사상연구회, 휴머니스트, 심산연구회, 고전연구회 등 5개였다고 한다. 그 중 동양사상연구회와 심산연구회는 인노회 활동으로 구속된 뒤 고문 후유증 끝에 분신 사망한 최동 열사가 속했던 곳이었다.
김순호는 전역 후에도 공작 활동을 이어갔음이 명백하다. 보안사가 작성한 녹화공작 시행 지침에 따르면 대상자들은 전역 후에도 군과의 활동망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되었있으며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에서 낸 보고서에도 (전역한 녹화공작 대상자를) 프락치로 활용한 대목이 존재한다. 이 사실에 따르면 김순호는 제대 후 노동운동에 입문한 건 처음부터 인노회를 와해 시킬 의도로 잠입한 것이 된다.
김순호는 인노회 구속과 동시에 89년 8월, 경장으로 특채된다. 김순호 국장을 경찰로 특채했던 사람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거짓말을 지어냈던 홍승상 전 경감이었다. 그리고 김순호가 대공분야에서 근무하던 90년대에 범인검거 유공 포상을 몇 차례나 받은 기록이 있다. 이것들이 과연 무엇의 대가였겠는가? 당시 노태우 정부는 공안탄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화 세력을 처참히 짓밟았다. 당시 경찰 특채와 포상의 조건은 불보듯 뻔하다. 그 시절 가장 가까웠던 동지는 치안본부의 비인간적 폭력조사 탓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와중에 김순호는 대공경찰 특채 뒤 승승장구하며 90년 당시 치안본부를 연상케하는 현 경찰국의 수장이 되었다. 같은 삶을 살아왔음에도 어떻게 이리 대비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김순호는 인노회 등 관련자 검거에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자신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주사파와 단절”을 위해 경찰을 찾아갔을 뿐이라는 터무니없는 변명만 늘어놓고있다. 또한 몇 년 전 김순호는 90년 최동의 죽음 때 왜 오지 않았냐는 지인의 물음에도 “당시 절에 들어가 경찰시험을 준비해 소식을 몰랐다”고 잡아뗐다. 김순호는 동지들을 밀고하고도 민주열사와 그 역사 앞에 일말의 반성조차 없었다.
정부는 이렇게 김순호 국장을 임명하며 경찰국이 30년 전 공안정국에 앞장섰던 치안본부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게 되었다. 독립성을 잃은 경찰은 정권의 수족 노릇을 하며 결국 민중을 탄압하게 될 것이다. ‘경찰’의 자격이 없는 김순호는 지금 당장 사퇴해야 마땅하다. 또한 김순호의 의혹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던 박근혜의 국정농단 당시보다도 못한 지지율을 기록하며 취임 한 달 만에 정권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큰 부정평가의 항목은 단연코 인사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인사는 만사라고 했다. 이러한 의혹투성이 문제의 인사는 필연적으로 불공정과 몰상식의 결과를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는 것은 과거의 수많은 불행한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휴가기간 동안 그토록 고심했다던 초심이 진정 국민이라면 ‘프락치’ 김순호를 지금 당장 경질하고 경찰국 설치를 철회하여 국민들이 우려하는 13만 경찰의 독립성을 즉각 보장하라!
만약 지금과 같은 불공정과 몰상식의 인사 기조를 이어간다면 공정과 상식을 바라는 국민은 박근혜 정권을 심판했던 것처럼 또다시 촛불로 윤석열 정부를 심판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22년 8월 11일
한국진보연대